[보훈뉴스] 특수임무 유공자회 구미시지회장 취임식 및 아동 성폭력 안전지킴이회 발대식 개최<한국유통신문.com>

선비 0 6,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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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25일 2시 구미시 88올림픽기념체육관 소극장에서는 '특수임무 유공자회 구미시지회장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과 더불어 '아동 성폭력 안전지킴이회 발대식'도 함께 개최했다.
 
특수임무 유공자회는 북파공작원 활동 및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 이뤄진 단체며 특수임무유공자들의 보훈과 권익향상을 위해 설립됬다.
 
이날 취임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내빈으로 참석한 윤창욱 도의원의 축사 후 '아동 성폭력 안전지킴이회' 어머니회 회원들의 선서식이 진행 된 뒤 단체 기념촬영을 끝으로 행사는 마무리 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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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애국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소리소문 없이 죽어간 무명의 용사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벌였던 이념전쟁과 그 분단의 아픔 뒤에 가장 먼저 소모품으로 희생되어간 사람들이 북파공작원이들이었고, 반세기 동안 '애국'이란 이름으로 그 존재조차 무시당했던 대한민국의 아들들이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했던 북파공작원들의 지난날은 실로 비극적인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1948년 육군본부정보국 산하 정보대, 공작과, 방첩부대가 신설됬고 1951년 공작과로부터 육군첩보부대 HID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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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국가보위를 위한 비밀역량 구축을 목적으로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북파공작원 훈련이 시작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했지만 이후 남북의 소리없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무장간첩침투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북파임무수행은 더욱 은밀하게 강화되었다.
 
북한의 도발에 응징하는 차원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이후 설악개발단이 창설되 강력한 응징보복체계가 구축, 비무장지대는 연일 크고 작은 국지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북파공작원의 임무는 도청, 문서탈취에서부터 군사시설 폭파 및 적군사살까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임무였다. 
 
당시 북파공작원들은 적에게 생포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도 국가의 명령에 포함되었고 이러한 내용들은 '행동경위보고서'에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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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훈련시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은 물론이고 단 한번의 휴가도 허락되지 않았다. 30kg 배낭과 모래주머니를 달고 매일같이 산악구보와 목숨을 내건 살인적이고 혹독한 훈련과 지뢰밭에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또한 훈련중 탈영자들에게는 배신자라는 이유로 무자비한 공개처형이 공공연히 자행됬다고 한다. 이들에게 인권이란 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병기가 되어있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평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익과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북파공작원들의 혹독한 훈련과 북파공작 활동은 양지로 떠오를 수가 없었고 이러한 국제정치상황과 남북간의 정치적 변화속에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북파공작원은 끊임없이 양성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젊은 청춘들의 애국혈기를 이용하여 갖은 꾀임으로 북파공작원들을 모집했다. 하지만 목숨을 건 훈련과 임무수행 후 아무런 사회적응훈련 없이 사회로 복귀한 이들의 삶은 인간이하의 참혹한 삶 그자체였다.
 
훈련이나 공작활동 중 많은 사람들이 희생됬지만 조국은 일말의 사과나 보상도 없이 이들을 조국의 이단아이자 범죄자로 치부했다.
 
사회복귀 후에도 이들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오랜 단절로 가족과도 소식이 끊겼다. 고통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대부분 유가족들은 지금까지도 생사여부도 모른채 반백년을 뜬 눈으로 기다리고 있다. 북파공작원들의 임무는 끝났지만 그들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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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정보사령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북파공작원의 총 수는 13,835명이며 이들 중 실종이나 행방불명된 북파공작원 수는 무려 7726명에 달하며 이는 월남전의 희생자 수보다 더 많다고 한다.
 
비무장지대 인근에는 북파공작원 희생자들의 무덤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고 북한에 체포되 있는 공작원이 130여명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희생과 애국의 자부심으로 아픔을 침묵으로 지켜왔지만 민주화 열풍과 함께 스며든 상대적 박탈감은 명예회복의 불씨를 키워냈고, 북파공작원의 실체인정과 명예회복을 위해 수백 번에 걸쳐 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2002년 3월 서울시내 한복판 도로위에서 설악동지회 회원들 250여명은 '북파공작원의 실체 인정과 인권유린에 대한 타당한 보상'을 주장하며LPG가스통에 불을 붙이며 목숨을 건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이러한 일련의 노력끝에 2004년 1월 8일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과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 만장일치로 통과됬다.
 
북한의 경우 남파공작원에 대한 예우는 중앙당 최고위 간부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남파공작원의 가족은 평생 자손 대대로 국가가 책임을 져줄 정도로 극진하며 대한민국과는 참으로 대조된다.
 
북파공작원은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박희광 애국지사와 같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독립투사들과 같이 뜨거운 애국심을 가슴에 안고 청춘을 몸바친 우리의 영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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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켜 줄 살아있는 영웅들에게 국가의 관심과 사회적인 배려가 더욱 필요할 때다.
 
<한국유통신문 경북지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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