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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Kim스토리텔링연구소(1)] 사찰 스토리텔링 사업에 관한 약술(略述)&국내최대불교문화관광단지 제안

김도형 0 853

 

 

 

Lee&Kim Story Telling Laboratory

 

 Story No.1 "사찰 스토리텔링 사업에 관한 약술(略述)" by Lee

 

 
1. 도개면 도개리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 ~ 신라시대 우물

 

모례(毛禮) : 신라 미추왕 때 당시 이 지방의 유지로서 신라 최초의 불교 신도. 고구려에서 중 아도(묵호자)가 불교전파를 위해 신라로 왔을 때 집안에 굴을 파서 3년 동안 아도를 숨겨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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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는 모례의 시주를 받아 도리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며, 아도가 손가락으로 어느 지역을 가르키며 그곳에 절을 하나 더 지으라고 하였는데 그 절이 바로 지금의 직지사이다.

 
도개 다곡리에는 우두실(牛頭室)이라는 골짜기가 있으며, 이는 당시 아도가 모례의 집에서 숨어 살 동안 우두실에서 소를 키웠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아래의 도리사 인근에는 양천골 이라는 이름도 전해지고 있는데 양을 천 마리나 길렀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도개리 모례가정은 신라불교 초전지(불교가 신라에 최초로 전파된 곳)로서 신라 때 파고 사용한 우물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깊다.

 
2. 도리사(桃李寺) : 도리사는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태조산(냉산) 기슭에 소재한 사찰로서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도리사 석탑이 있다. 김천 직지사의 말사이지만 신라최초의 사찰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도리사 입구에는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태조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 개국을 준비할 당시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 곳 산에서 훈련을 하며 나라를 세울 꿈을 그렸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냉산 이라고도 한다.

 
앞서 언급한 아도가 이곳 산 밑에 이르자 때가 한창 겨울인데도 산허리에 복숭아꽃(挑), 배꽃(李)이 만발한 것을 보고 거기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도리사에서 아도가 손가락으로 지정한 곳에 절을 지으라 하여 지은 절이 김천의 직지사이다.

 
3. 죽장사(竹杖寺) :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에 있는 사찰로서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5층 석탑은 국보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미지역 내의 사찰 탑으로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10미터로 전탑형의 5층탑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죽장리의 명칭에 관한 유래가 또 하나의 전설이고 스토리텔링의 한 주요요소이다. 선산의 명산 비봉산은 봉황이 나는(飛) 모습의 자태를 이름하여 비봉산이라 하는데, 비봉산의 봉황이 대나무 열매와 이슬만 먹으며 선산을 지키고 큰 인물이 나도록 한다는 믿음에서, 봉황이 날아가지 않도록 붙들어 두고자 대나무를 심고, 죽장(竹杖)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리학설(택리지)에 의하면, 비봉산은 봉황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에 날으려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동쪽으로는 교리 뒷산, 서쪽으로는 노상리 뒷산이 있어 두 날개이며, 현재 선산 출장소 뒤의 봉우리가 몸과 모가지가 된다. 이러한 산의 모양으로 봐서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옛말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산 주민들에게 큰 걱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비봉산의 봉황이 날아가 버리면 어찌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아읍 황당산에 그물을 친다는 의미로 동네 이름을 망장이라 했으며, 물목 동네 뒷산을 ‘황산(凰山)’이라 이름을 지어 짝을 맞춰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봉(鳳)은 수컷이요, 황(凰)은 암컷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선산읍 동네 이름 중 죽장(竹杖)이라 하여 댄자무를 심어 순으로 봉황의 먹이를 대어주고, 화조리는 봉황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만화백조(萬花白鳥)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선산 읍내 고유 동네 이름으로 영봉리(迎鳳里)라 한 것은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을 말하는데...

 
선산읍내 영봉리(지금의 노상리, 이문리, 완전리)는 세종 때 한 마을에서 하위지, 전가진, 유면, 정초, 정지대, 하담 등 장원, 부장원 6명을 배출, 장원방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이다. 야은 길재, 하위지, 김종직, 생육신의 이맹전 등에 관한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들이 즐비하게 배출된 곳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장군이 이 산을 보고 인재가 많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봉산 주령 허리를 끊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큰 쇠못을 꽂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하의 주장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지만) 선산이 인재의 보고라는 것이 일정시대 조선총독부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의 경상(대구)관할경시청에서 조사한 바로는 선산읍에 있는 선산향교(교리 향교)를 없애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방침이 지방 토호세력과는 절대로 부딪히거나 다투지 말라는 엄명이 있어 이를 지키면서 향교를 없앨 방법을 궁리한 나머지 교리동네 전체를 당시 피부병과 문둥병이 창궐하던 터라 문둥이 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가장 자연스럽게(?) 향교를 폐교할 수 있는 최상의 방안으로서...

 
다시 말해서 향교에 출입하며 공부하는 젊은 선비 중 하나가 심한 옻을 걸려 고생 중이었는데, 이를 빌미로 동네 전체를 문둥이 수용소(문둥이 촌)으로 만들어 향교가 자연스럽게 폐쇄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로서 선산 향교에서 배향하던 여러 윗대 위패를 금오서원과 인동향교 등으로 이전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가 있다. 그런 이유로 선산향교는 당시 그렇게나 많이 보유하고 있던 전답 등은 단 한 조각도 없어진 이상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전국의 어떤 향교나 서원치고 운영에 따른 전답이 수십 수백 년씩 내려오고 있음과 비교해 보면 쉽게 납득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과거 속칭 동답이라고 불리는 전답이 실제로는 일제에 의해 풍비박산이 난 선산향교 소유의 재산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다. 다만 이는 금전적 문제가 결부된 관계로 설화적인 이야기로만 되새겨 볼 따름이다.

 
4. 수다사(水多寺) :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 12번지 연악산 자락에 자리한 직지사 말사이다. 선산지역에서 도리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절로 잘 알려져 있다. (무을면이라는 명칭은 지형이 새가 춤추는 형상과 같으며, 모든 면에서 앞서 간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수다사는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이 결집하여 호국법회를 열었던 호국사찰이다. 수다사에서 내려오고 있는 전통농악은 전투농악으로서 잘 알려져 있으며 북과 징, 꽹과리 등이 빠르고 격정적인 리듬으로 정재진이라는 스님에 의해 전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무을(舞乙, 춤새)은 마을 행사로 무을풍물이 유명하다. 무을풍물은 무을면 무이리를 중심으로 상송리, 오가리 등지에서 전승·공연되는 전통 풍물놀이로서 발원지는 상송리에 있는 수다사(水多寺)이다.

 

약 300년 전 수다사에 있던 승려 정재진이 구전되어 내려오는 내용을 소재로 하여 풍물 가락을 만들어 인근 마을로 전파시킨 것이 시초이다. 무을면과 김천시 일대에는 아직도 “정재진 나고 매구 나고, 엄복동이 나고 자동차 났으며, 안창남을 위하여 비행기 나왔다”라는 말이 뭇사람들의 입으로 전하여 오고 있어 무을풍물의 발원지가 수다사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재진 이후의 전승은 분명하지 않으나, 약 100년 뒤 무을면 오가리의 이군선(본명 이경춘, 1868~?) 상쇠가 풍물 가락을 집대성하여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경지에 올려놓았다. 그 후 명맥만 유지하다가 1990년부터 재건 작업이 본격화되어 199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현재의 박원용 상쇠로 가락이 이어지고 있다.~


수다(水多)라는 의미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감로법수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찰 주변에는 무을 안곡지(安谷池)를 비록, 상주의 정상지, 선산의 대원지 등 특히 큰 못이 많은 것도 사찰 이름인 ‘수다’와 일맥상통하고 있어 신비롭다.


해평 도리사 가는 길이 느티나무 가로수길이 계절에 상관없이 한없는 운치와 정감을 주고 있듯이 무을의 수다사 가을 풍경은 노랑색 은행나무의 채색은 가슴 벅찬 감탄사를 저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멋지고 아름다운 낭만 가득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상 구미지역 특히 선산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에 담긴 설화와 역사 등을 보면 ‘불교 전파의 역사’와 ‘선산이라는 인재의 고향’에 관한 것 및 ‘호국불교로서의 수다사’ 등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Story No.2 "신라불교 최초 전파지로 알려진 구미시 도개, 국내 최대의 불교문화관광단지 조성 " by Kim

 

신라불교초전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신라는 없었다?
신라불교의 성지 이전에 고구려 불교 계승지로서의 문화적 발상의 전환 필요

 

천년고도라고 불리며 신라의 역사 문화를 품고 있는 여행지인 경주에 위치한 보문관광단지(普門觀光團地)는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경주시 보덕동에 위치한 관광지로, 보문호수를 중심으로 호텔과 리조트 등 관광휴양지와 우양미술관 그리고 골프장과 문화레저시설 등을 갖춘 국내 최대의 관광 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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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관광단지는 1971년 8월에 정부에서 경주관광개발계획을 확정했고, 1974년에 착공해, 1975년에 보문관광단지 지정 및 경북관광개발공사를 세웠고, 1979년 4월에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개장하였으며, 전체 면적은 총242만평으로 개발 면적은 210만평이다.

 

보문관광단지의 중심격인 보문호수는 경주시 동쪽 명활산 옛 성터 아래 만들어진 50만평 규모의 인공호수로 주위에는 국제적 규모의 호텔과 경주월드 등을 각종 위락시설과 공원시설이 갖춰지고 있다. 호수를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정비되어 있으며 호수 주변에는 유람선 선착장, 보문상가, 육부촌, 골프장, 우양미술관, 야외공연장 등이 있고, 봄에는 벚꽃이 만개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경주 보문관광단지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관광보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구미시는 수려한 낙동강과 태조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지난 2011년부터 경상북도 3대문화권문화관광기반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구미시 도개리 일대 부지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지 1천600년만에 이를 기념하는 공간을 조성해 불자들과 지역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경상북도 3대문화권 문화관광기반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지난 2011부터 ‘신라불교문화초전지’를 성역화하는 사업으로 추진돼 왔다. 도개리 모례가정 일대 11,167평 부지에 건축연면적 약 767평 규모에 국비 131억원과 도비 17억원, 시비 52억원 등 총 200억원을 들여 2017년 10월 13일 완공된 한옥과 초가 집 등을 조성해 교육과 불교문화체험 공간으로 이용해 오고 있다.

 

한편으로 필자는 유서 깊은 ‘신라불교초전지’라는 문화적 바탕 위에 아도화상이 세운 천년고찰로 알려진 도리사라는 출중한 문화자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주 불국사에 비해 조명받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태조산에 위치한 도리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한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아도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도리사가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경주 토함산에 있는 ‘부처의 나라’란 뜻의 불국사는 통일신라 시대 김대성이 지은 절로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겠다는 뜻을 담아 만든 절이다.

 

불국사는 신라 시대 불교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세계에서 인정한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진 소중한 우리네 문화유산이다.

 

부처의 나라라는 이름에 맞게 불국사 곳곳에는 부처의 나라를 나타내는 건축물들이 산재하며 이는 신라 장인들이 30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결과이며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 조차도 완성된 불교문화예술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불국사를 보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했다. 부처의 나라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만드는 불국사.

 

하지만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추구하는 동양인들의 사상을 살펴봤을 때, 필자는 불국사 보다는 도리사의 가치가 더 드높다고 생각한다.

 

순교자의 땅, 도개

 

최근 구미시 도개면에 위치한 신라불교초전지 일대를 탐방해 본 필자의 느낌은 태조산이 바라다보이는 명승지인 모례가정 인근에 자리잡은 터가 사뭇 남다르다. 이곳은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온종일 따스한 햇볕이 내리 쬘 것 같은 온화한 지형적인 특징과 인적이 드문 마을의 고요함이 옛적 신라역사의 한 숨을 느끼게 만든다.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마을 중앙 위치한 오래된 우물인 모례가정은 현재 경북문화재자료 제296호로 ‘모례’가 사용한 것으로 전해져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이라 불리며 모례장자샘, 모례가정(毛禮家井), 모례정 등으로 불렸다. 일선군의 지역 유지였던 모례는 신라 최초 불교신자로도 알려져 있다. 넓은 농토와 많은 가축을 길러 모례의 집에는 항시 사람들이 오갔다. 고구려을 오간 모례는 고구려 스님들의 영향으로 불심이 깊었다고 한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법흥왕 이전, 이차돈이 참형을 당하기에 앞서 이미 정방과 멸구자 등 고구려 스님들이 모례의 집에서 불법을 홍포하다 순교한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의 속성상 역사의 기록은 극히 일부분에 그치기에 기록에 남지 않은 스님들의 순교는 더욱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의 불교전파는 다수의 고구려 무명 스님들의 순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신라로 들어와 불교를 전하려 했던 이유는 순수한 종교적 염원이었고 끝없이 계속된 고구려 스님들의 전법에 신라는 점차 불교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신라불교는 왕의 최측근인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국교로 인정받게 됐으며 이는 고구려 스님들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지 100년만의 일로 지방이 아닌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불교문화의 번성이 시작된 것이다.

 

아도화상이 신라불교를 최초로 전파했다는 설이 지역에서는 신봉될 수 밖에 없으나, 아쉽게도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다. 또한 화려함을 추구한 불교는 경주의 왕족과 귀족들의 문화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발전했다.

 

신라불교 사상의 발달사를 살펴보면 원효대사의 아미타신앙(정토신앙)보급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했고, 특히 의상대사가 창시한 화엄종은 통일 직후 신라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

 

통일 전 불교의 종파는 자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戒律宗)이 유행해 국민사상의 통일에 큰 몫을 담당했다고 하며 의상대사의 화엄종은 원융사상(圓融思想)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크게 번성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신라불교 사상의 변천사 역시 의미가 있으나 누가 뭐래도 신라불교의 정신적 기원은 단연코 구미의 도개 모례가정 신라불교초전지라 할 수 있다.

 

왜 불교계에서는 신라불교초전지 성역화에 미온적일까?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성지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는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예루살렘을 비롯해 동양의 불자들이 찾는 티벳 성지 순례 지역인 카일라스 산(수미산).

 

우리나라에도 신라불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신라불교초전지가 있음에도 생각보다 많이 찾지는 않는다. 신라불교의 시작과 정신적 기원이 역사적으로도 분명히 남아 있는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관심과 반응은 그다지 뜨거워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계에서 논의를 거쳐 십시일반 힘을 모아 모례가정과 신라불교초전지를 불교문화의 성역화 장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구미시 도개면 신라불교초전지 인근에는 도개IC와 상주IC 등 교통망이 발달해 있고 구미IC에서도 30분 거리며 추후 의성과 군위 신공항 유치에 따른 관광문화 파급효과 역시 면밀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지리적 이점이 풍부한 곳이다.

 

단양에 위치한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와 같은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웅장한 불교도시처럼 도개 신라불교초전지의 활용도 또한 불교문화의 재도약을 위해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곳이다.

 

또한 낙동강과 태조산 그리고 비봉산을 낀 신라불교초전지 일대는 경주 보문관광단지와 같이 각종 호텔과 리조트 그리고 문화레저시설과 미술관 등이 함께 자리 잡을 수 있는 관광문화산업의 훌륭한 기본 바탕을 가지고 있다.  


신라불교초전지 앞으로 보이는 태조산은 고려 태조 왕건에 엵힌 역사와 후삼국 통일의 얼이 서린 유서깊은 장소이다.

 

태조산의 유래는 일선부의 동쪽 13리에 고려 태조왕건의 어가가 머무르던 곳이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후삼군 격전지였던 이곳 태조산은 팔공산 동오수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한 왕건이 선산지방에서 군사를 모았다.

 

이때 일선김씨 시조인 김선궁과 해평김씨 시조인 김훤술 등이 도와 냉산에서 숭신산성을 쌓고 낙산3리 칠창부락에 일곱개의 군창을 두고 견훤과 싸워 크게 승리르 거둔 왕건은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를 '여진(나의나루)'이라 명하여 지금까지 낙산3리에 지명이 남아있다. 또한 견훤의 아들 신검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니, 그 접전지가 지금의 고아읍 일대로 관심리 앞 들을 '어갱이', 송림이 앞 들을 '발갱이', 괴평리 앞들을 '점갱이'라 불리고 있으며 이들 평야의 전투에서 신검을 사로 잡고 항복을 받아 삼국 재통일을 했다는 유래가 전해온다.

 

이처럼 삼국을 아우르는 역사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에 새로운 문화적 번영과 도약을 위한 생명의 숨길이 불어 넣어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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