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월파정 건립 특혜 영남유교문화진흥원에 대화 제안!

김도형 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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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1일 영남유교문화진흥원 신축건물 공사 현장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공공문화재 보관 영남유교문화진흥원에 대화 제안

막대한 도.시비 지원에 이어 월파정건립 10억 원 투자 특혜 주장
"감사원과 사법기관의 심판 면할 수 없을 것"이라며 경고

구미시 월파정 복원 계획 심사숙고 요청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1일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이하 구미본부, 상임대표 김종길)는 영남유교문화진흥원에 대한 제안서를 발표했다.

 

구미본부는 "전임 시장 당시 결정된 4억원의 시.도비가 사랑방 명목으로 카페 형태의 시설을 짓는데 또다시 투자되고 있다"면서 지금은 월파정 건립에 10억원이 투자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구미본부는 "예산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이쯤 되면 이것은 특혜를 넘어서서 아예 특정인을 위해 그냥 지원하는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다면 감사원이나 사법기관의 심판을 결코 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라며 특혜에 따른 법적책임을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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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본부는 구미시의회의 영남유교문화진흥원의 예산 지원에 대해 전면적이 감사를 실시하라고 주장하는 한편 월파정 복원만이 능사가 아니라면서 "월파정 복원에 뛰따르는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검토가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편으로 구미본부는 베일에 쌓인 영남유교문화진흥원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소통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구미시의 월파정 복원에 대한 3개 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제안했다.

 

구미시 월파정 복원에 대한 3개안
1안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280(사적 제336호 낙산리 고분군 활용)
2안은 선산읍 독동리 산 71-3(시도기념물 제60호 금오서원 활용)
3안은 구미시 선산읍 원리 산 65-2(주변공원 및 구미보 활용)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의 입장

1. 구미시는 구미시의 문화적 자산인 불교와 일리천 전투, 성리학과 근현대 역사의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 구미시는 다양한 트래킹 코스나 도보 산책길, 역사문화 탐방의 방안을 기획, 검토하여야 한다.
3. 구미시의회는 영남유교진흥원의 예산 지원에 대하여 전면적인 감사를 실시하라.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발표자료 및 제안서 내용 전문>

 

1. 영남유교진흥원을 바라보는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의 심정은 복잡하다. 불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영남유교진흥원(이하 진흥원)에는 막대한 사비(私費)가 출연되었고, 각각 30억 원 이상의 구미시비와 경상북도 도비도 투자되었다. 진흥원에 대한 예산  지원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전임시장 때 결정된 그대로 4억 원의 시 · 도비가 사랑방 명목으로 카페 형태의 시설을 짓는데 또 투자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월파정 건립에 다시 10억 원이 투자될 예정이다.
예산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이쯤 되면 이것은 특혜를 넘어서서 아예 특정인을 위해 그냥 지원하는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다면 감사원이나 사법기관의 심판을 결코 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구미시는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판단을 재고해야 할 것이며, 구미시의회는 진흥원에 대한 예산지원 전반을 철저하게 감사하여 구미시가 불필요한 시비에 말려들지 않도록 고삐를 단단히 조여야 한다.

성리학의 원전인 4서 3경의 가르침은 고루하고 진부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지금도 금과옥조로 삼을 만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치국평천하를 지향하는 학문이다. 말하자면 세계평화가 바로 성리학의 근본적인 목표인 것이다.
성리학은 자본주의를 미화하지 않는다. 봉건제 아래의 선비들도 탐욕으로 얼룩진 물질 숭배의 세태를 무서울 정도로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래서 성리학은 자본주의에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성리학에서 이상으로 삼는 토지제도는 고대의 정전제(井田制)이다. 이 제도는 명백히 토지겸병과 독점을 반대하고 있으며, 토지공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성리학의 기본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명문대가의 후예들은 1925년 이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큰 논리적 갈등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관혼상제와 예의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조선 중기 이후 합리적인 성리학자들은 제사에 대해서 정성을 다하되 검소하게 지내도록 강조하고 이를 유훈으로 남겼다. 목관을 사용하고 명정은 종이로 쓰는 경우도 그런 실천의 방편이다.

진흥원 경내에는 원래 선산읍의 낙남루 앞에 있었던 비석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가 별다른 공론의 과정도 없이 이전되어 있다. 문화재는 공공재(公共材)이다. 어떻게 개인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구미본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더 심한 것은 공공재인 문화재를 경내로 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시, 도비를 지원받았으면서도 진흥원의 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는 현실이다. 무엇 때문인가. 시, 도비의 지원을 받은 이상 진흥원은 이제 개인이나 법인의 재산만이 아니다. 예상했든 그렇지 않았던 진흥원은 공공의 영역으로 진입하였다. 진흥원은 더 이상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 진흥원 측의 반성을 촉구한다.

2. 구미본부는 진흥원에 대화를 제안한다. 진흥원이 무용지물로 방치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월파정은 강서(江東) 쪽에 건립되어서는 안 된다. 복원한다면 해평 낙산리 《월파정 산》 아래 원래의 장소에 세워져야 한다.

4. 제안서를 쓰기 위하여 해평 괴곡리의 명경당을 방문하였다.
작고 아담한 명경당에는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 진락당 김취성, 두곡 고응척, 기촌 송순의 시들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모두가 조선 최고의 유학자들의 시(詩)들이다. 특히 퇴계의 시는 퇴계선생문집에도 없는 시이다. 작고 아담하지만 실로 대단한 가치를 품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명경당은 조선 중기의 학자 용암(龍巖) 박운(朴雲, 1493~1562)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서재이다. 임진왜란 때 제사가 불타 없어지자 후손인 박율(朴慄)이 재건하여 명경신당(明鏡新堂)이라 하였다.
박운의 스승 송당 박영(朴英 1471~1540)과 친구 진락당 김취성(金就成 1492∼1551)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두곡 고응척(高應陟 1531~1605),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 등이 명경당과 관련된 글을 남겼다.
장현광이 남긴 ‘명경신당 제사(明鏡新堂 題詞)’에 ‘용암이 생존해 있을 때 집 앞에 당(堂)을 설치한 후 그 아래에 못을 파서 네모지게 만들고 당호를 명경(明鏡)이라 하였다. 애석하게도 병란을 만나 당은 빈터가 됨을 면치 못하였는데 상사공(上舍公, 박율의 백부이자 양아버지)이 모재(茅齋) 몇 칸을 설치하였다. 그 후 상사공이 별세하자 서재가 다시 또 무너졌는데 이제 마침내 옛날 주춧돌을 정돈하여 새 서재를 건축하니 방이 두 칸이고, 대청이 한 칸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두산백과에서 인용)

지금 명경당은 보수공사로 분주하다. 그런데 공사에 투입되는 시멘트의 비중이 너무 높다. 후손들로서야 이렇게라도 정성을 표현하고 싶겠지만 소박한 정취와 고아한 옛 멋이 훼손될까 두렵다. 명경당과 관련된 자료들을 발굴하고, 이를 스토리텔링으로 연결한다면 구미시가 자랑할만한 문화유산으로 위상이 제고될 것은 명확하다. 구미시의 관심을 촉구한다.

 

 

《제안서》
구미시는 월파정 복원 계획을 숙고(熟考)하라.
= 복원(復元)만이 능사가 아니다. 복원에 뒤따르는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검토가 더 중요하다.

최근 구미시는 월파정(月波亭) 복원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보고서는 부여받은 과제를 잘 정리하고 결론도 원만하게 제시하였지만, 몇 군데 사실 확인에 결정적 착오가 있어서 매우 실망스럽다.

보고서 4쪽 월파정을 중수한 선산부사는 “권성”이 아니라 권훈(權勛, 1590~1662)이다. 13쪽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월파정 야유기”는 구미 월파정이 아니라 서울의 노량에 있는 월파정이다. 따라서 18쪽 “월파정 야유기”를 인용,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추론이다.
또 문소세고(聞韶世稿)에 수록된 월파정 시의 작가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시인 질재(質齋) 김창문(金昌文, 1649~1675)이다. 작가를 밝히지 않은 25쪽에 수록된 시는 단계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선생의 작품이다. 같은 25쪽 “황주 월파루기”의 작가는 “김종직”이 아니라 “정약용”이다.

월파정은 이름이 좋은 탓에 서울, 강릉 경포대, 황해도 황주, 경기도 과천, 김해시 진영, 전북 임실 등 전국의 여러 곳에 건립되었고, 아직도 대다수는 보존되어 있다.

구미의 월파정은 조선이 건국된 7년 뒤인 1399년 선산부사 최관(崔關, ?~1424)이 건립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은 “월파정기”를 저술하였다. 월파정은 건립된 이래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널리 알려져 영남의 6대 누정(樓亭)으로 꼽혔고, 전국의 고관대작들과 일본의 사신들, 시인, 묵객, 선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교통의 요충지에다 낙동강의 수운(水運)에도 편리하여 상선들의 주요한 기착지(寄着地)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일선지(一善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본의 사신이 배 타고 올 때마다 / 扶桑 使者 每 楊舲
십리의 잔치 마련해 송영하기 관례로세 / 十里 樽牢 慣 送迎
성명한 임금의 성교가 멀리까지 미치니 / 賴 是 聖明 聲敎 遠
고을 원이 자주 월파정을 오른다오 / 遨頭 頻 上 月波亭

월파정은 부의 동쪽 10리쯤 되는 여차진(餘次津) 가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오는 일본(日本)의 사신에 대해서는 본부에서 반드시 여기에서 잔치를 베푼다.

보천탄 위에는 장삿배들이 모여들어 / 寶泉灘 上 集 商帆
일천 가호 집집마다 소금을 먹게 되었네 / 千室 人人 食 有鹽
누가 백성을 착취하여 영리를 꾀하는가 / 誰 要 脂膏 營 什一
예로부터 청렴한 장관이 드물었다오 / 古來 長吏 罕能 廉

보천탄은 해평현(海平縣) 서쪽 5리쯤에 있는데, 바다의 장사치들이 봄가을마다 이곳에 배를 대어 물건을 팔고 돌아간다. (김종직, 佔畢齋集, 允了 作 善山地理圖。題 十絶 其 上。에서 인용)   
 
월파정은 1602년 금오서원이 인근으로 옮겨오면서 조선 성리학의 성지(聖地)로 인식되어 전국적인 유명세(有名稅)를 타게 되었으며, 월파정의 존재는 구미의 성리학 발전에 구심점으로 발전되었다.
 
첫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도들이 월파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李生員 承彥,元參奉 槩,李生員 鐵均,郭進士 承華,周秀才 允昌,金秀才 宏弼。會 府 之 鄕校。討論 墳典。時 與 病夫。問辨 數月 矣。聞 八月 中。主上 將 視學 取士。治任 告辭。送之 以 詩。

월파정 서쪽에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반가웠지
跫音 喜聽 月波 西 (佔畢齋集 卷 十三, 위의 詩에서 인용)

둘째, 월파정과 해평 괴곡리의 《명경당(明鏡堂)》을 중심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결집하였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1524년부터 26년 인동부사로 부임한 이래,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2) 선산도호부사로 부임한 1552년까지의 시기에 구미의 성리학 또한 바야흐로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해평의 명경당은 용암(龍巖) 박운(朴雲, 1493~1562)이 즐겨 머물던 서재이다. 이곳에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 회재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 기촌(企村) 송순(宋純), 노수함(盧守諴, 1516~1573),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 1492~1551), 죽정(竹亭), 장잠(張潛, 1497~ 1552), 고응척(高應陟, 1531~1605),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시를 읊었다.
명경당은 작고 아담한 건물이지만, 회재와 퇴계의 시를 비롯하여 지역 선비들의 시들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여헌 선생도 명경당에 대해 글을 남겼다.( 旅軒先生續集 卷一, 詩○五言 長篇, 次 諸君 韻。題 明鏡堂。// 旅軒先生續集 卷四 , 雜著,  題 明鏡堂 四先生 空字 絶句 後// 旅軒先生文集 卷八, 雜著, 明鏡新堂 題詞)

셋째, 월파진과 맞은 편의 원당은 여헌 장현광 선생의 학문이 최초로 꽃핀 곳이다.
1595년 보은현감으로 부임한 여헌은 1956년 3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인동의 옛집이 전란 중에 무너져 거처할 곳이 없었던 여헌이 강학을 위해 머문 곳이 바로 월파진 상류였다.

[1596년 /3월/ 일 미상] (三月)
翌日。來 宿 于 善山府 內 驛里。

[1596년 /3월/ 일 미상] (三月)
翌日。渡 月波津 直抵 古村。純伯 誠伯 見 余至。且 喜 且 怪 余 告 以 棄官 來托 之 意。遂 虛 其 一室 以 處之。(피난록 기록 중에서 인용)

이 시기의 구체적인 사정은 “선조 문강공 피난록(避難錄)”과 “계상설”(溪牀說, 旅軒先生 續集 卷四, 雜著)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헌(旅軒)이란 자호(自號)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혹독한 전란의 시기에 선생의 학문과 능력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들로는 해평의 터주들인 건재(健齋) 박수일(朴遂一, 1553~1597) 형제와 생질인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 1569~1620), 최산립(崔山立, 1550~?)이 있다. 이들은 여헌이 학자로서 성장하는 데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경임은 월파정에 관한 시도 여러 편 남겼고, 여헌의 제자이기도 하다. 피난록이 보존된 곳은 용암 박운의 종가이다. 사위 박진경(朴晉慶, 1581~1665)도 이때 만났다.
선생이 이곳에 머물자 인근 각지의 젊은 선비들이 다투어 제자가 되었다. 선생은 1607년 이민선(李敏善, 1548~1626), 인재 최현(崔晛, 1563~1640) 등 지인들과 함께 금오산 대혈사(大穴寺)에 와서 휴식하였다. (구미시지, 하권 289쪽, 2005년)
 
넷째, 19세기 중엽부터 구미와 인동에서 배출된 사미헌 장복추(張福樞, 1815~1900)의 제자들도 동낙(東洛)의 부지암정사와 월파정 사이에서 활동하였다.

장복추는 선산 생곡에 건립된 원회당 중건 상량문(遠懷堂 重建 上樑文, 四未軒文集 卷八)을 저술하였다. 지역에는 장복추의 문인과 사우들이 10여 명에 달한다. 모두 당대의 일류들이다.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월호(月湖) 김지원(金志遠, 1841~1906), 식헌(息軒) 최헌식(崔憲植, 1846∼1915),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 모두가 사미헌의 문인 사우들이다. 김지원은 영화감독 김유영(金幽影, 1909~1940)의 증조부이다.

월파정이 건립된 후 정자가 위치한 작은 뫼는 이름을 얻었다. 월파정산이다. 지금 낙산리 고분군 중 가장 많은 81기의 무덤을 품은 산이 바로 월파정산이다. 월파정은 이 산의 하단부에 건립되었고, 20세기 초까지 보존되었으나 그 후 유실되거나 자연스레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월파정의 풍치에 반한 퇴계의 제자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 1457~1521)은 “南國 名區 眞 第一”이라 평가하였고, 장희춘(蔣希春, 1556∼1618) 1607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기록한 일기(日記) 해동기(海東記)에 “眞 嶺南 之 第一 江山”이라 기록하였다.

권근(權近, 1352~1409). 유방선(柳方善, 1388~1443). 하위지(河緯地, 1412~1456), 김종직, 성현(成俔, 1439~1504),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송순, 퇴계의 제자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노경임(盧景任, 1569~1620),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50여 명 이상의 제현들이 시와 글을 남겼다. 퇴계(退溪) 선생 최초의 시는 “過 吉先生 閭, 癸巳(1533년)”이다. 월파정에 들렀을 가능성이 있다.

노경임의 유 로자암기(遊 鸕鶿巖 記), 의성의 선비 경와(敬窩) 김휴(金烋, 1597~1638)의 영귀정 범주기(詠歸亭 泛舟 記), 칠곡의 선비 회구(悔咎) 이덕록(李德祿, 1722∼1792)의 「낙강동주록(洛江同舟錄)」, 상주의 선비 수계(修溪) 이승배(李升培, 1768~1834) 낙강 범주 시(洛江 泛舟 詩와 같은 작품들은 월파정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가장 최근의 글로는 인동(仁同)의 장석기(張錫基, 1836~1918), 전북 만경(萬頃) 출신의 근대적 지식인으로 장지연 선생의 동지이기도 한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가 공무(公務)로 인동에 왔다가 월파정에 올라 시를 남겼다. 구미와 인동 출신 선비들의 문집에는 더 많은 시와 글들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석좌교수인 유홍준은 도리사 서대(西臺)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의 풍광이 전체 유역에서 가장 수려하다고 극찬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17세기 들어 상주의 선비들은 도남서원에서 동락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여 구미의 곳곳을 순례하였고, 칠곡이나 남쪽의 선비들은 동락과 해평을 거쳐 월파정, 송당(松堂) 더 나아가 로자암(鸕鶿巖), 낙동까지 뱃놀이를 즐겼다. 이러한 선비들의 풍류는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1928년 5월 26일 신간회(新幹會) 선산지회 간부들은 금오산 채미정에서 간부회의를 가졌다. 일본 경찰이 회의 장소에 임석하고 바깥에는 순사들이 파수를 서는 으스스한 분위기에서도 그들은 토론을 이어갔다. 중심인물인 김수호(金琇鎬, 1896~1963, 독립운동가로 서훈), 박상희(朴相熙, 1906~1941), 이종하(李鍾夏, 1907~1932)의 이름이 기사에서 확인된다. (동아일보 1928년 6월 5일 발행 4면 9단 기사 참조)

1928년 9월 2일 선산청년동맹에서는 “세계 무산(無産)청년의 날“을 맞아 진평동 동락진(東洛津)에서 참가회비 20전의 원유회를 가지려고 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금지하였다.(동아일보 1928년 8월 30일 4면 11단, 기사 참조)

1931년 10월에는 고아 강정 율림(江亭 栗林)에서 밤 줍기 대회(拾栗大會)가 열렸다.
이 밤나무 숲은 역사적 연원이 있다. 점필재 김종직은 선산도호부사 시절 ”동지수“(冬至藪)라는 호안(護岸) 방품림의 조성을 계획하고, 선산읍에서 금오서원 입구까지 10리에 이르도록 밤나무를 심었다. 동지수는 한 권력자의 개간 열풍에 밀려 20세기 초에 사라졌다. 강정의 율림은 선산에서 떠내려오거나 옮겨 심은 밤나무로서 동지수의 마지막 흔적이었지만 1960년대 이전에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10월 1일 3면 10단 기사 참조, 당일 회비 1원에 점심 제공)

월파정은 이처럼 유서(由緖)가 깊고, 여러 측면에서 역사적 연원이 있는 정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이하, 구미본부)는 흔쾌히 정자의 복원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첫째, 월파정이 복원된다 하더라도 애석하게도 옛 멋과 우아(優雅)함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월파정은 달이 밝은 밤에 풍치가 뛰어났다. 달빛은 교교하고, 낙동강의 물결은 찰랑이는데, 춘풍 추상(秋霜)의 계절 따라 제각각 다른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마음에 맞는 벗들과 고담준론을 곁들이며 기울이는 한 잔의 술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뿐인가. 월파정은 낮에도 경치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무심한 세월 따라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정자 바로 아래로 흐르던 낙동강의 물길이 바뀌어 멀리 서쪽 생곡동 쪽으로 옮겨졌다. 메마른 들판에 정자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정자를 짓는다 하더라도 풍치를 보완할 방안이 필요하다.

둘째, 월파정 복원을 구미시에 제안한 독지가의 존재 때문이다.

구미시는 독지가의 제안에 따라 전임 시장 시절에 월파정 복원을 계획하고, 이미 예산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 독지가의 존재는 시의회의 회의록에서도 확인된다. 시의회에서도 독지가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곱지 않다. 월파정 복원에 대한 2년 동안의 논의에서 구미시의회는 은연중 여러 이유를 들어 불평을 토로하였다. 2019년 들어 시의회는 독지가의 존재에 대해서 공식화하였다. 독지가는 바로 “영남유교진흥원”의 대표로서, 노(盧) 회장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독지가의 존재 때문인지 구미시에서 구미시의회에 설명하는 과정도 매우 석연치 않다. 당초 구미시는 《영남유교체험장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예산도 무려 10억 원이다. 의원들의 추궁이 이어지자 담당과에서는 비로소 월파정 복원 계획을 밝혔다.

○문화관광담당관 ○○○
저희들은 구미보 옆에 절개지에 거기 보면 빼어난 경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영남 6대 문물 중에 하나인 우리 월파정을 구미보 옆에 암반으로 되어 있는 절개지에 거기에 이제 건립할 계획으로 돼 있습니다. 다른 지역은 거의 다 보수완료 했는데 저희 지역만은 지금 빠져가 있는 상태거든요. 《제221회 구미시의회(임시회). 기획행정위원회회의록
일시 2018년 4월 30일(월) 오전 10시 회의록 중에서》

구미시는 정자 복원이 검토되는 초기인 2018년부터 원래의 정자 자리인 강동(江東)의 해평 쪽이 아니라 강서(江西)의 구미보 옆에 월파정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또 정자에 오르는 경험을 “유교문화체험”이라고 포장한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를 넘어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모든 것을 미리 정해 놓았다면, 관련 용역은 무엇 때문에 추진했는지 도무지 의문스럽다.

최근 구미시는 지역의 문화계 인사들과 월파정 복원에 대한 자문을 거쳤다고 한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원래의 장소인 1안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미본부도 지으려고 결정한다면 그나마 1안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낙동강 물은 되돌릴 수 없지만 정자의 주변에 보리나 밀, 과수, 유채 등을 심어 풍치를 보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미시는 월파정 복원에 대해 다음 3개의 안을 가지고 있다.
1안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280(사적 제336호 낙산리 고분군 활용)
2안은 선산읍 독동리 산 71-3(시도기념물 제60호 금오서원 활용)
3안은 구미시 선산읍 원리 산 65-2(주변공원 및 구미보 활용)

이에 다음과 같이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의 입장을 밝힌다.

1. 구미시는 구미시의 문화적 자산인 불교와 일리천 전투, 성리학과 근현대 역사의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운영경비도 막대하게 소요되고, 성과도 느리게 나타나는 지난(至難)한 작업이다. 구미시의 노력과 대안 마련으로는 한계를 드러낸다. 42만 구미시민의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또 전국적인 문화 역량과도 결합하여야 한다.
그러나 구미시 문화의 주체는 42만 구미시민이다. 시민 차원의 준비와 노력이 없으면, 시민들의 주인의식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결코 남이 살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지역이 창출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회재 선생 산책길, 길재 선생 이후의 5현 또는 10현의 역사, 월파정과 해평 명경당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 집단에 대한 연구, 동락에서 낙동까지의 풍경을 조사하고 그 가치를 보존하는 활동, 여헌과 구미 문화의 관계, 구미를 지켜온 유력 문중의 중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동향들에 이르기까지, 구미는 중세와 근대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소재로 넘쳐나고 있다.
구미시는 하루 빨리 각 문중의 골방에서 잠들어 있는 문집을 모아서 자료로 만들고, 필요한 부분을 번역하여, 이를 이야기로 재현하는 활동을 시작하여야 한다. 조금 더 시간이 지체되면 자료는 영구히 사라질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 서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일리천 전투도 좋은 이야기 소재이다. 일리천 전투는 구미시 전역의 지명(地名) 속에 녹아 있고, 곳곳에 전설과 많은 이야기 소재를 남기고 있다. 해평의 칠창과 어성정, 태조산, 여차진, 생곡동의 태조방천, 지산동 앞들과 발검들 노래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소재는 풍부하다.

2. 구미시는 다양한 트래킹 코스나 도보 산책길, 역사문화 탐방의 방안을 기획, 검토하여야 한다.

낙동강 양안(兩岸)을 비롯하여 인동에서 해평의 명경당에 이르는 회재 선생 산책길, 장천에서 도리사 불교 초전지에 이르는 영남대로를 활용한 트래킹 코스나 도보 산책길, 인동의 천생산에서 신촌을 거쳐 동낙서원에 이르는 역사탐방 코스, 구미역에서 상모동 · 왕산기념관을 연결하는 근대사 탐방 등 42만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능하다면 이를 시티투어에 결합하는 방안도 검토되어야 한다.

시민의 참여를 통하여 구미시 문화관광자원의 가능성을 42만 구미시민과 함께 점검하는 과정을 가지는 것은 구미시 정책의 정당성과 합 목적성을 높이는 과정이 될 것이다. 42만 구미시민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에게 권할 수도 없고, 시민들의 환영을 받는다면 그것은 개발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단체의 제안도 거부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42만 구미시민의 지혜와 경험이 결합한다면 구미시 문화관광 정책은 한결 풍성해질 것으로 확신한다.

3. 구미시의회는 영남유교진흥원의 예산 지원에 대하여 전면적인 감사를 실시하라.

                       2019년 12월 11일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구미근현대사연구모임

 

연락처: 상임대표 김종길 010-5476-1720

《참고자료》

新幹 善山支會 臨時會  
동아일보 1928년 6월 5일 발행 4면 9단(5월 26일 채미정)

金琇鎬(1896~1963), 朴相熙(1906~1941), 李鍾夏(1907~1932)
 
善山靑盟委員會  
     동아일보 1928년 8월 30일 4면 11단
9월 2일 인동면 진평동 東洛津에서 원유회 회비 20전  

 
讀者慰安 拾栗大會 主催 朝鮮 東亞 兩 善山支局  
         동아일보 1931년 10월 1일 3면 10단 (고아 江亭 栗林) 
밤 줍기 대회(회비 1원에 점심 제공)

 

遊 鸕鶿巖 記
       敬菴先生文集 卷二 / 記
四月 望。軟碧 方 嫩。日氣 正好。招 野老 數三。理 小艇 携 壺酒。出 月波 向 鸕鶿。蓋 紓 鬱懷 攄 幽趣 也。是 日 天朗 而 氣淸。風恬 而 波靜。棹夫 運檣。載泛 載止。或 容與 乎 沙汀。或 停泊 乎
柳渚。薄暮。始 繫舟 巖下。酒 數杯。逍逕 周視。則 奇崛 突兀。半 入 波心者。巖 之 體 也。枝榦 虯蟠。蒼翠 凝寒者。巖 之 松 也。縹緲 江表。翼然 不動者。觀水樓 也。端秀峯 前。森然 以 峙者。鷄頭巖 也。元興 夕煙。龜洞 歸雲。晻藹 蔥蔚。氣象 萬千。而 沙鷗 錦鱗。翔泳 目前。亦 可樂 也。無 何。素月流輝。長天 如 水。醉扶 還舟。塵宂 頓忘。宛 彼 中央。任 其 所之。扣舷 而 歌。寄懷 虞唐。浩浩 若 御 仙槎 而 遊 廣寒 也。噫。恒 萬古 而 不變者 巖。而 逆旅 宇宙。倏來 倏往者 人 也。則 吾輩 安得 不作 今日 之 遊 哉。
今日 之 遊。亦 曾點 風雩 之 樂 也。豈 特 風雩 之 樂 哉。鳶飛 魚躍 之 妙 存乎 其 中。山 自山 水 自水。峙者 峙 流者 流。各安 其 理。而 無 一毫 安排 作 爲底 意思。古人 所謂 仁智 之 樂 其 在 此 乎。噫。俯仰 今古。今古 荒茫 而 古人 不可 復見。則 爲 今人者 之 感慨 爲 如何 哉。於 是 乎 記。

 

詠歸亭 泛舟 記
              敬窩先生文集 卷七 / 記 // 김휴(金烋, 1597~1638)
歲 在 癸亥(1623년) 黃梅 之 月。余 寓 詠歸亭。亭 卽 外舅 敬庵公 之 所構 也。勝觀 絶致。與 月波亭 相 上下 焉。亭下 有 長潭。泓停 淵深。環亘 十餘里。但 無 隣里 相過 從者。寓居 已 久。漸覺 無聊。有時 乘 小艇。盤閶 嘯詠。以 舒 胸中 湮鬱 之 氣。
一日 往 玉山。拜 旅軒先生。來時 道城 訪 諸 君子。言 及 詠歸 船遊 之 樂。諸公 皆 欣然 願 從。遂 約日 而 還。翌朝。金子亮,金汝涵 契丈 及 金靜汝,金汝澄,澹汝 昆季。金源叔,金泰初 諸人。自 坪城 來。盧秀才 士述。自 餘次里 載網 而 至。李士眞 契丈,崔伯玉 戚叔。不期 而 來 自 海坪。此 亦 奇 矣。列坐 江 之 邊。蔭垂 柳 弄 淸波。談賞 移時。午後。登亭 坐 未定。金汝源 自 文洞 來。亦 未 有 前約 也。乃 周覽 亭宇。縱觀 形勝。有 山陽 懷舊 之 感。
日 將 夕。反 而 入舟。戛 蒼壁 泝流 而 去。斯時 也。潭鱗 競躍。渚禽 雙飛。落照 漾紅。晴影 涵碧。沿江 白沙。極目 無際。金烏 冷山 諸峯。出沒 於 靑林 之 表。其餘 萬千 氣象 悅 人目者。固 不可 悉 也。遂 擧酒 相屬 而 言 曰。洛江 風景。都 在 是 矣。
今日 之 遊。不 亦 樂 乎。但 李君瑞 早來 于 此。未及 登舟 而 辭去。朴明述 以 事 出。盧明仲 丈 以 病止。金秀才 敬彥 猶 未至。有約 而 莫 與之 同。是 可恨 也。言 未 已。遠見 沙渚。有 下馬 來者。乃 敬彥 也。泊舟 而 迎。與之 同坐。爲 厥 岳丈 傳語。蓋 邀之 也。
到 鯉淵。日 已 昏黑。使 漁人 網魚。欲 投宿 敬彥 岳丈 家。旣 至 居處 甚隘。人 不能 容 其 半 焉。乃 辭 主人。上馬 將 遊 于 鄕 之 校。汝源,汝澄,澹汝 三人。皆 落後。欲 問 友人 疾 也。時夜 將半。月出 未出。仰觀 則 星象 羅耀。俯視 而 山影 蒼茫。相顧 謔浪。聯轡 而 行。林 深 路 黑。不暇 論 也。
抵 校齋。齋中 諸人。皆 熟睡。相蹴 而 起。敍 寒暄 畢。烹鮮 命 酒。錯綜 人物。譏評 文章。浩浩 如 也。已 而 缺 月 漸高。遠鷄 初唱。堂壇 氷淨。無 一點 塵。此 則 船遊 之 所讓 也。
明日。有司 金汝獻 又 設酒。酒 罷 將 還 臨分。余 倚馬 而 言 曰。今來 數君子。皆 敬庵公 同志 友 也。昨遊 豈 非幸 也。然竊 有 所感 焉。敬庵公 雅 有 山水 之 趣。卜地 於 此。將 欲 爲 藏修 之 所。經營 累載。始克 成就。蓋 欲與 同志者 共之。而 此計 未成。遽至 不祿。江山 之 無主 久 矣。往來 之 行路。尙 此 興悲。況 在 同志 而 來遊者 乎。
願 數 君子 自今 以後。每 於 佳辰 令月。招朋 命侶。來 遊 此地。永久 不替。以 慰 無主 之 江山。則 江山 無主 而 有主 矣。美景 如此。勝事 如此。感懷 又 如此。不可 無言。盍 記之 以 圖 後會 也。於 是 皆 曰 諾。遂 歸 而 爲之 記。     

 회구문집 (悔咎文集)    
 
『회구문집』은 이덕록(李德祿, 1722∼1792)의 시문집이다. 이덕록의 자는 사행(士行), 호는 회구(悔咎),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이 책은 1955년 후손 승락(承洛)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평이하고 담백한 어조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여러 정감들을 진솔하게 표현한 것이 많다. 사실적인 표현과 담백한 언어의 절제미가 돋보인다.

잡저(雜著)의 「낙강동주록(洛江同舟錄)」은 오래도록 꿈꾸던 낙동강 유람을 70세가 되어 비로소 실현하게 된 기쁨을 11일 동안의 여정을 따라 역동적으로 묘사한 서정적인 글이다. 친지 등 21명과 함께 공암(孔巖)을 출발하여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송당(松堂)·영당(影堂)·월파(月波)·매학(梅鶴)·동락(東洛) 등의 승경을 보며 느낀 감회와 질탕한 풍류를 웅장한 문체로 표현한 뛰어난 기행문이다.

이덕록의 아버지는 수인(遂仁)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동명(東鳴)의 딸이다. 종조부 이시암(李時?)에게서 수학하였고, 극빈한 생활에도 지극한 효성으로 안빈낙도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洛江 泛舟 詩 // 李升培(1768~1834)
        修溪先生文集 卷一 / 詩
是 歲 八月 之 晦日。吾商 耆老 遊 東洛。亦 欲 較藝 鄕 秀才。風聲 黨塾 羣鱗 躍。簡書 東南 速 鉅匠。昇平 盛遊 起 矍鑠。使君 淸興 亦 不淺。願 與 州彥 同 其樂。况 値 年豐 民事 簡。黃雲 滿野 庭 無雀。印帖 星馳 下 津吏。首尾 船艦 長 繩縛。靑雀 白鵠 平 如 掌。中流 蕩漾 張 帷幕。長艇 十丈 橫 成橋。陸地 望 若 神仙閣。彤幨 五馬 俄 騈闐。歌皷 隱隱 雜 管籥。美人 靑眸 刺 劍戟。蹋然 雙舞 驚鴻 若。坐客 盡 是 吾 商望。蒼然 傑氣 秋天 薄。芝令 平兄 分 第次。自顧 沙礫 徒 慙怍。
是 時 靑 衿簇 明沙。十八名 邑 傾 城郭。平明 水頭 懸 高竿。官鄕 兩題 雙 煜爚。須臾 墨客 爭 揮灑。白雪 梨花 交 錯落。天公 却會 添 畫景。江雨 霏霏 喧水 鶴。預儲 兩舶 具 帲幪。別鋪 文席 移 歇泊。暖爐 博山 張 獸炭。血膋 脾臄 恣 燔灼。明璫 左右 香澤 聞。酌滿 醍醐 供 歡噱。醉把 朱毫 分 諸卷。點別 高下 聲 揮靃。
地主 笑 謂 同座 老。莫 或 遺珠 譏 盲矐。二榜 得雋 多 英才。列郡 諸儒 稱 恢廓。水波 不興 天宇 朗。肆筵 設饌 因 如 昨。翠眉 淸聲 呼 榜名。東西 畫舫 分 各各。綺饌 雪牋 長 第進。船外 榮枯 暫 不惡。畫 角雲 簫盪 一江。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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