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3.1운동 100주년 임은동 만세운동 지도자 강용준 지역사회 소개

김도형 0 2,474

《성명서》


100년이 지난 오늘, 임은동 만세운동의 지도자 강용준을 지역사회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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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동 3.1만세운동은 지난 100년 동안 기록 속에 오롯이 박제(剝製)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당시 유일한 한글신문인 매일신보나 일본어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마을 사람 모두가 참가한 임은동 만세운동은 신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임은동 만세운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34년 경북경찰부가 발간한 고등경찰요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해방 후 작성된 독립운동사 자료집, 3.1운동 재판기록, 원호처, 구미시의 관련 기록은 모두 고등경찰요사의 기록을 약간 첨삭한 것에 불과하다.

 

임은동의 만세시위는 잘 계획된 운동이었고, 동민 300여 명 모두가 참가하여 만세의 함성으로 독립의지를 드러내고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는 점에서, 실로 모범적인 만세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중심인물로는 애국 유지 또는 구미면 유지인 강용준(姜龍俊) · 유시동(劉時東) 두 사람만 성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다수의 청년들이 초기부터 만세 시위의 계획에 참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1919년 4월 8일 오후 10시 무렵에 두 사람이 마을을 돌자 동민 31명이 뒤를 따랐고, 이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자 곧 마을 주민 300여 명 모두가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니, 당시 임은동의 항일의식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이 소식을 듣고 하루 뒤인 4월 9일 순사부장 이하 4명, 일군 수비병 5명, 인동 일군 헌병주재소로부터 헌병 2명이 마을로 달려왔다. 이때 이곳 애국 군중들은 마을 뒷산으로 종적을 감추어 일제의 군경은 의거 군중들을 한 사람도 검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결국 일제는 4월 15일 기습적으로 마을에 들어와 만세 주동인물을 전부 검거하였다. 애석하게도 판결문이 전하지 않아 보다 상세한 내용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이하 구미본부)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임은동 만세운동에 대하여 조사를 시작하였다. 무모한 시도였으나 동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임은동 만세운동과 마을의 근현대 200년 역사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고, 특히 임은동 만세운동의 지도자인 강용준(姜龍俊, 1892~1950)의 손자와 후손들을 만나게 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고등경찰요사는 임은동이 의병장 허위(許蔿, 1855~1908) 선생의 출신지라는 점을 주목하였고, 완고한 “양반촌”이라는 사실도 빼놓지 않고 서술하였다. 임은동은 금오산 약사봉에서 시작된 산맥의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청정한 산세가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실로 산자수명한 마을이라 부를만하다.
 
아환(亞寰) 허헌(許★土+憲, 1858~1937)이 쓴 임은기지사실(林隱基地事實)에 따르면, 마을이 조성된 시기는 조선 중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본래 상민(常民)들이 살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1807년 김해허씨 4 가구가 김해에서 임은동으로 옮겨왔으며, 이들이 연달아 대소과에 진출하면서 일약 이 마을은 선산과 구미, 인동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금오공과대학 선주문화연구소, 왕산 허위의 사상과 구국의병항쟁 중 이동영, 왕산 허위의 생애와 사상, 15쪽, 曾祖考 贈 通政大夫, 奎章閣 副提學, 成均生員 府君 墓誌。허훈, 舫山先生文集 卷 19, 丘墓文)

 

이곳에 정착한 허씨 일문은 선산과 상주, 인동, 성주, 칠곡, 고령, 경남의 뛰어난 선비들과 두루 교류하였고, 반대로 임은 마을로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찾아들기도 하면서 임은동은 경향 각지 선비들의 훌륭한 교류처가 되었다. 또한 허씨 일문은 1820년대에 마을에 오양서숙(五養書塾)을 창설하여 인근의 자제들을 가르쳤고, 1900년대 초에는 임은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成均生員 訥窩 許公 墓碣銘 [幷 序], 장석룡, 遊軒先生文集)

 

3.1운동 당시에 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스승이 바로 앞에서 말한 아환 선생으로 허호 전 구미시의회 부의장의 조부 되는 어른이다. 아환은 왕산 선생과 불과 3살 아래이고,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 1864~1921)보다는 6살이 위였는데, 세 분 모두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특히 아환의 부친은 의금부도사를 지낸 허도(許燾, 1829~1899)로서 위암 선생의 부친과 깊은 우의를 나누었으며, 따라서 위암과 아환의 교류도 자별하였다.


강용준의 字는 子雲이며, 본관은 진주강씨이다. 선산읍에서 세거하던 박사공파 일문의 후예로서 한말의 풍운이 몰아치는 1892년 임은동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임은동에 뛰어난 학자들이 많고 성리학의 학풍이 진작된다는 소문에 따라 선비들이 모여들자 강용준의 조부 강달형(姜達馨, 1846~1916)이 1870년대부터 처음으로 임은동에 출입하였다고 하며, 아버지 강성희(姜聖熙, 1863~1923)는 아예 임은동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전통적인 마을이 대개 그렇듯이 임은동에 세거한 진주강씨는 김해허씨와 오태동의 인동장씨와 오랜 세교를 맺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칠곡군 지천면 출신으로 진주강씨 박사공파의 후예인 혜사(蕙社) 강원형(姜遠馨, 1862∼1914)이다. 강원형은 1905년 초 왕산이 일본군사령부에 연행되자 감연히 석방을 청원하는 글을 올렸다. 이러한 활동과 독립운동에 따른 공적으로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이때의 정황을 왕산선생거의사실대략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05년 때는 위태롭고, 형세는 험해져서 아무도 감히 선생을 구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독 前 시독(侍讀) 혜사 강원형(姜遠馨)이 큰 이익을 위해서는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선생의 석방을 청원하는 글을 투함하였으니[逆 龍麟 探 虎牙 投 請釋] 여기에서 그 우의의 중함을 알 것이다.》

 

또 김천 조마면에서 세거하던 진주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 두어 가구는 사돈 관계인 인동장씨와의 인연으로 19세기 말부터 오태동에 거주하였다가 3.1운동 이전에 임은동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부친이 임은동으로 이사함에 따라 강용준은 임은동에서 태어나 이 마을에서 어린 시절부터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호흡하게 되었다. 성리학을 존중하는 집안의 가풍에 영향을 받아 그는 어린 나이에 마을의 서당에 입학하여 학문을 익히게 되었다.

 

1907년 임은동과 오태동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 왕산 선생은 13도창의대진소를 꾸린 의병활동으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가 15~6세였으니, 이미 어엿한 소년 장부가 되었고, 자연스레 마을의 선배와 어른들로부터 독립운동의 내력을 듣고 자란 그는 일찍이 투철한 항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산 선생과 스승 아환, 위암 장지연은 일찍이 근대를 수용한 이른바 혁신유림이었다. 이들 임은동의 선각자들은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출발점이자 근본인 성리학의 가치를 굳게 지키려고 하였다. 또한 주변의 나약한 선비들이 실리만을 추구하면서 다수가 친일로 기울 때도 의병전쟁과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로 끝까지 헌신하면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였다.  

 

이런 어른들의 가르침은 켜켜이 축적되어 고스란히 소년 강용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또한 스승에게 성리학을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또 다른 감수성으로 시대의 변화를 일찍부터 감지하게 되었으며, 근대를 시대의 대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웃인 오태 나루는 오래전부터 낙동강 수운(水運)의 요충으로서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근대적 상품을 싣고 드나들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임은동으로 찾아드는 선비들을 통하여 급격하게 변해가는 근대의 민낯과 바깥 세계의 다양한 소식을 접하면서 성장한 강용준은 한 사람의 근대인으로 청년기를 맞이하였다.  

 

1919년 임은동 만세 시위를 계획부터 지도할 때 그는 27세의 열혈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임은동 만세 시위는 4월 2일 성주 장날에 일어난 성주군의 만세시위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의 만세시위는 뛰어난 독립운동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 ~ 1962)이 추진한 파리장서운동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심산은 1919년 2월 말에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상경하였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3월 1일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고, 3월 2일에는 고종의 인산(因山)이 있어서 전국의 명망 있는 선비들이 이 무렵 전국 곳곳에서 서울로 몰려들고 있었다.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유림이 한 사람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현실을 수치스럽게 여긴 심산은 마침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 유림들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려는 파리장서운동에 착수하였다.


계획이 현실성 있게 진척되는 것을 확인한 심산은 3월 15일을 전후하여 성주로 돌아와 먼저 동지들에게 만세운동의 과정을 전달하고,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9)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 1919) 두 거유들에게 파리장서의 문안을 감수 받은 후 서둘러 서울로 상경하였다. 심산은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고, 만주의 봉천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단발하였다.

 

성주의 만세운동은 유림과 기독교 세력이 연대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워 진행되었다. 만세 시위는 4월 2일 성주 장날 군민 수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애국 군중 가운데 선비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의 2명이 현장에서 쓰러져 순국하고, 성명 미상 7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유혈이 낭자한 현장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으나 군중은 부득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 시위는 4월 2일 11시 벽진면, 4월 3일 수륜면, 4월 6일 대가면, 4월 6일 월항면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성주군 군중시위의 소식은 칠곡군의 석적면, 북삼면, 구미시의 임은동으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이들 마을에서도 임은동 만세 운동의 영향을 받아 4월 9일 석적면 중동과 성곡동, 그리고 북삼면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관련 3.1운동 재판 기록 참조) 

 

3.1운동 이후 강용준의 활동은 100년이 지난 오늘 날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마을을 떠나지 않고, 마을의 지도자이자 유림의 일원으로, 또한 구미면의 유지로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균형 있는 삶의 전형을 몸소 실천하였다는 사실만은 집안에 전해내려 오고 있다.


그는 생애에 아들 다섯에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아들 다섯을 제대로 키우고 가정의 생계를 살피면서, 동시에 성리학적 가치를 지키고 관혼상제에 충실하다 보니 그의 생애는 실로 성실과 검소 그 자체였다고 한다.


주경야독을 실천하면서, 아주 가끔씩 서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청년들을 만나면 반드시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우치면서 많은 청년들에게 근대식 학교에 다닐 것을 권면하였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리와 명절을 지켜야 한다고 후학들에게 항상 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근대를 수용한 혁신 유림답게 아들 다섯을 모두 근대식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는 임은동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을 두루 망라하여도 선각자로 평가받을 만한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특히 넷째 아들과 막내아들은 임은동에서 동장만 20여년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강용준은 허만섭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함께 마을의 치안유지에 주력하였고, 좌우로 갈라져 치열하게 전개되는 사상의 갈등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데 주력하였다고 한다.

 

임은동 만세운동의 지도자 강용준의 최후는 실로 비극적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강용준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 했고, 8월 초순 아들들과 함께 형곡동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8월 16일 맥아더 사령부는 인민군의 낙동강 진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왜관에서 구미까지 이른바 융단폭격을 실시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날의 융단폭격은 8월 16일 11:58분부터 26분간 왜관 서측 낙동강 대안 상에 폭 5.6Km, 길이 12Km지역에 B-29폭격기 98대가 900여 톤의 폭탄을 투하하는 융단폭격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강용준은 이 날 진행된 미군의 융단폭격에 의한 오폭으로 장자(長子)와 함께 형곡동 천변(川邊)에서 사망하였다. 오폭으로 인하여 그뿐만 아니라 1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최후가 아닐 수 없다.

 

임은동 만세운동은 지도자 강용준의 비극적 최후와 함께 그에 따른 기억도 세인들 사이에서 잦아들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지금껏 지역사회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 하였다.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에 따르는 당연한 서훈과 예우도 지금껏 추진되지 못 하였다.

 

2018년 광복절을 맞아 인동 3.12만세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은 이범성이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따라서 강용준 선생도 비록 재판기록이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서훈 자격은 충분하다.

 

구미시에는 강용준 선생 외에도 장진홍 선생의 대구조선은행 폭탄의거에 참여한 박관영(朴觀永, 1899~?), 신간회 선산지회와 건국동맹에서 활동한 박상희(朴相熙, 1906~1946), 신간회 선산지회장 이재기(李再基, 1880~1950) 등은 그들의 헌신적인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로 서훈 받지 못 하고 있다.

 

이에 구미본부는 강용준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서훈 받을 수 있도록 빠른 시일 내에 신청서류를 보훈처에 제출할 것임을 지역사회에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1. 임은동 만세운동의 지도자 강용준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서훈 받을 수 있도록 구미시와 구미시의회의 적극적인 관심을 강력히 촉구한다.

 

2. 구미시 근대사의 산실이자 독립운동의 성지(聖地)인 임은동, 오태동, 상모동의 마을 역사를 발굴 · 정리 · 기록하고 이를 스토리텔링(storytelling)화 하는데 대한 구미시의 적극적인 지원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2019년 3월 5일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구미근현대사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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