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경북 2월의 독립운동가 영주 김상덕 선생 강연회 19일 고령에서

김도형 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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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출처 경북독립운동기념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2월 19일 고령 대가야문화누리 가야금홀 강연회 개최

 

(전국= KTN) 김도형 기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김희곤)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영주(令洲) 김상덕 선생을 ‘2019년 경북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2월 19일(화) 오후 2시부터 고령 대가야문화누리 가야금홀에서 강연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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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대가야문화누리 전경(사진 출처 지민이의 식객)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에서 태어난 김상덕(金尙德, 1891~1950 납북) 선생은 1919년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운동에 참여하여 3.1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이 때문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0년 풀려난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선생은 만주와 중국 관내를 오가며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이듬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경북대표로 참여하였다. 이어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긴 선생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직부위원․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비서 등을 역임하였고, 1934년에는 신한독립당 상무위원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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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제3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념


그 뒤 1943년부터 1945년 11월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학무부차장과 문화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맞아 귀국한 선생은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아 올바른 역사 세우기에 앞장섰다. 선생의 공적을 기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기념관은 2월 한달 동안 기획 전시와 안동MBC 라디오 캠페인 방송을 통해 선생의 이러한 자취를 알릴 계획이다. 더불어 2월 19일에는 「김상덕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허종 교수의 강연이 있을 계획이다.

 

이번 강연회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과 고령문화원(원장 김인탁)이 공동주관하며, 고령군과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회장 정희철)에서 적극 후원하였다. 곽용환 고령군수와 김선욱 고령군의회 의장, 박정현 도의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장과 고령 군민 14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2019년 경북 2월의 독립운동가 김상덕 공적내용

김상덕(金尙德, 1891~1950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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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김상덕 선생

1891년 12월 10일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영주(令洲)이며, 김상철(金相徹)·김재두(金在斗) 등의 이름도 사용하였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에 1년 다닌 뒤, 1915년 경신학교에 들어가 1917년 3월 졸업하였다. 일본 도쿄로 유학한 그는 1919년 1월 6일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국제정세를 말하면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웅변대회 열기가 한껏 타오른 가운데 최팔용이 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나라 안팎으로 보내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김상덕은 실행위원 1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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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서(서명자에 김상덕 이름이 있음)

2월 8일 조선유학생학우회 임시총회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백관수와 김도연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면서 2.8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제 경찰이 해산을 요구하자, 모임에 참가한 학생들이 맞서면서 격투가 벌어져 집회를 더 이상 이어가질 못했다. 김상덕을 비롯한 독립선언서 서명자 등 주역 17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김상덕은 금고 7개월 15일형을 받고, 1920년 2월 9일 출옥한 뒤 곧장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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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후 중국 상하이에 도착을 알린 보도기사(독립신문 1920년 3월 6일자)

1920년 3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고, 같은 기간에 열린 극동혁명청년대회에도 21명의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상하이로 돌아온 뒤 그는 국민대표회의 준비에 참가하고, 1923년 1월부터 다섯 달 동안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경북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절하게 개조하자는 주장을 폈다. 1924년 4월 상해청년동맹회 조직에 참가하여 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 조직은 그 무렵 의열단과 쌍벽을 이룰 만큼 크고 강했다.

김상덕은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겨 김응섭 등과 함께 지린성에서 한족노동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평균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삼으면서 먼저 민족 독립을 이루자는 강령을 내건 민중 지향성이 강한 조직이었다. 이어 1927년 9월 ML그룹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으로 남만주 지역의 당 조직부장이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에는 좌우합작운동으로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에 앞장섰다. 또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으로 개편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 겸 책임비서가 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에 매진하던 그는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이 국민부와 한국독립당으로 양립하자 한국독립당(만주)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당은 11월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고, 그는 한국독립군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한국독립군은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던 중국인 부대와 갈등을 빚자, 해결책을 찾으려고 1933년 김상덕과 신숙을 난징으로 보냈다. 마침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김구와 장제스 가 만나 한인 청년을 장교로 양성하는 방안이 결정되었고, 이에 필요한 교관으로 이청천을 비롯한 만주 한국독립군 주역들이 초청되어 난징으로 합류하였다. 김상덕은 1934년 4월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난징에서 조직된 한국혁명당을 통합하는 데 앞장서서 신한독립당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다시 1935년에 의열단과 한국독립당(상하이) 등 5당이 합쳐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을 만들 때, 김상덕도 여기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 뒤로 민족혁명당에서 이청천과 홍진 등이 이탈하여 다른 정당을 만들었지만, 김상덕은 민족혁명당에 남았고, 중일전쟁 동안 난징에서 우한·구이린을 거쳐 충칭에 도착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민족혁명당은 1941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제1 야당이 되었다. 이에 김상덕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경상도 의원이 되었다. 또 1943년 4월에는 선전부 선전위원이 되고 학무부 차장을 맡았다.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가진 마지막 직책은 오늘날 문화관광부 장관과 같은 문화부장이었다. 해방이 되어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을 비롯하여 15명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1진으로 돌아올 때, 그는 문화부장으로서 여기에 속했다. 1946년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되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반민족행위자 색출과 처벌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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