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25시] 역사 왜곡,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발단 김무성(1)-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구미를 찾은 이유는?<한국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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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일 구미시를 찾은 김무성 전 대표 이날 이승만 대통령 관련 특강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우호적 인사들과 사담을 나눴다.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8일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역사교과용도서의 다양성 보장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은 역사교과서의 국정 발행체제를 원천 금지하고 검·인정만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고, 이에 교육부는 다양성보장위원회를 설치해 역사교과서의 검·인정 기준을 심의토록 했다.

 

국가가 책임을 지고 교과서를 제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국정교과서는 출판사가 개발한 도서의 적합성 여부를 국가가 심사 및 허가하는 체재다.


법안이 올해 중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면 교육부는 현재 집필 중인 중등 역사과 국정 교과서 제작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지난해 10월 29일 전국의 초·중·고 교사 2만1379명은 국정교과서 반대 시국선언을 발표했고 11월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는 퇴직공무원 656명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퇴직교사 시국선언'을 하는 등 국정화 반대를 위한 용렬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현직 교원들은 국정화 반대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몸을 사리는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근본적인 발단은 2013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추진한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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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전 대표는 2013년 12월 18일 자신이 주도한 당내 모임인 '근현대사 역사교실' 종강 세미나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긍정하는 교과서가 자칫 출판조차 좌절될 뻔한 것을 우리가 막았다" 는 말을 남겨 논란이 됐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한 고등학교의 철회가 잇따르기도 했다. 당시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교학사 사태의 원흉이 바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에게 책임이 있음을 지목하기도 했다.


역사왜곡을 비롯해 심각한 사실관계 오류까지 드러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비상식적으로 밀어붙여진 결과물로 평가되고 있고,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의 목적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와 역사의 재구성을 통한 장기집권 발판 마련을 목적으로 추진됐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국정교과서를 통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함으로서 1919년 4월 13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체성을 흐려 친일 세력들의 합리적인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전략도 포함돼 큰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친일세력 후손인 김무성 등과 같은 정치인들은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고 있고 이 날을 건국절로 정해 그 이전의 민족에 대한 반역행위는 역사의 망각 속에 가둬놓고 싶어한다. 친일 반민족 반국가 행위를 통해 얻은 기득권을 정당화시키고 싶은 욕심의 발로에서 국정교과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해방이후 그 세력이 와해될 것만 같았던 친일파들에게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기사회생할 절호의 순간이었다. 이유는 이승만과 미군정은 친일파 처벌에 적극적인 반대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들의 경험을 중용해 정부를 이끌어 나갈 재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살아남은 친일세력들은 최상위 기득권층으로 또다시 대한민국 사회를 리드하는 집단으로 남기 위해 자신들이 누리는 권력과 부에 대한 역사적인 정당성을 갖기를 바라고 있고, 일련의 작업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함으로서 역사를 왜곡하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있는 것이다.


김무성 전 대표는 지난 7월 19일 이승만 전 대통령 제51회 추모일을 맞아 추모사를 남겼다. 김 전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은 나라의 국부로서 당연히 추앙받아야할 모범이었다"라며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이자 국부로 추앙했다.

 

김 전 대표는 추모사에서 "건국이란 단어는 사람으로 얘기하면 '생명의 탄생'과 같기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말"이라며 건국을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누리며 인간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음을 강조했고 일제의 유산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좌우가 극한 대립을 벌이며, 열강이 맞부딪히는 한반도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력과 리더십으로 인해 건국이 됐음을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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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페이스북

 

또한 김무성 전 대표는 국가 안보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며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드 배치'와 관련해 국론 분열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국민의 생명이 걸린 사활적 안보문제"라는 생각을 내보이며, 사드 배치 문제와 같은 안보 이슈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을 떠올린다는 말을 남겼다.


김 전 대표가 평가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굳건한 국정철학과 균형감각을 갖춘 현실론자"로서 추모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의 어려운 상항에서 슬기롭게 우직한 결단을 내리고 냉철하게 나라를 이끌어간 지도자이므로 나라의 국부로서 당연히 추앙받아야 한다는 논조를 보이며, 건국 대통령으로 위상을 높이자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만드는데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다.

 

김무성 전 대표가 의미 부여한 건국 대통령과 국부론의 전제는 그가 수차례 얘기한 "과보다 공이 크다면, 긍정적인 부분을 보고 높이 평가해야만 우리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에 기인한다.

 

김무성 전 대표의 과를 배제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자신의 부친 김용주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2001년 이후 결성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건국대통령과 국부로 재평가하자는 의견이 있어왔고, 이명박 정부 당시 구체화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평생을 독립운동가로서 보여온 행적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에서는 교육사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반면에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의 지시를 비롯해 친일을 자행했던 경찰과 군인 그리고 관료 출신들을 반민특위습격 사건 후 '반공투사'로 칭송하며 대거 등용한 점은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주의를 통해 친일세력들에게 쏟아질 화살들이 다른 곳으로 돌려졌고, 친일세력은 반공투사로 변신해 더욱 공고히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하기 시작하게 됐다.

 

자발적, 지속적, 반복적인 친일행각을 벌인 김무성 전 대표의 부친 김용주, 일본제국주의의 엄친아

 

2013년 당시 김무성 대표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부친 김용주의 과거 일에 대해 일제시대 당시의 언론보도를 인용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시 국내 언론보도를 보면 선친께서는 은행원 신분으로 독서회를 만들고 야학에서 가르치다 은행에서 내침을 당했다. 그래서 세운게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삼일상회'다. 일본 경찰로부터 집요한 상호변경을 압력을 받은 끝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몸도 약한 분이 헌병대·경찰서에 수시로 끌려가는 등 요시찰 인물로 찍혔다. 또 29세 때 재산의 절반을 털어 포항영흥보통학교를 세웠다. 식민지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려는 취지였는데 이명박 전 대통령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분이 어떻게 친일파인가?"

 

점입가경으로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새로운 역사인물찾기라는 미명아래 청어 출판사에서는 '강을 건너는 산'이란 제목의 김용주에 관한 평전 책을 출판했다.

 

책을 알리는 광고에는 김용주에 관해 "조선인 제거 명단 중 포항 지역 총살 대상 1호였다!"라며 알렸고 현대사의 격랑 중, 오해와 왜곡 속에 감춰진 한 애국자의 진실이라는 설명으로 김용주에 대한 인물 묘사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실장은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과거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애국자가 아닌 친일 행위에 앞장선 인물이었음을 명료하게 알리며, 그 실체를 분명히 했다.

 

김무성 전 대표의 부친 김용주는 1937년 5월 10일 영일군에서 민선으로 경상북도 도회의원에 선출됐고 1941년 5월에 재선되어 1945년 해방때까지 8년간 도의원을 유지했다. 1930년대 이후 시작된 지방의회는 당시 제한선거로서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지역 유지만 지원 가능했으며 도의원 45명 중 15명만이 관선이었고 나머지는 민선이었다.

 

박한용 교육실장은 일제시대 당시의 도의회에 대해 "지역 친일파들의 집결지"라며 일제치하 당시 도의회의 명확한 정의를 내린 인물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1940년 2월 23일 제12회 경북도회 회의에서 김용주는 "국체명징관 내에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라고 말했다.

 

박 실장에 따르면 당시 김용주가 말한 내선일체는 일제 시대 당시 조선과 일본은 하나의 뿌리이므로 일본의 황국민으로서 정신을 심어야 된다는 취지로 발언한 말이라고 하며,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대구에 신사와 같은 국체명징관을 설립했고 김용주는 1천만원 상당을 기부한 바가 있다. 또한 김용주는 1940년 11월 10일에는 일본의 건국기념일 행사에 참석해 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941년 7월 15일에는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 평의원으로 임명됐다.

 

김용주는 8년 3개월간의 경북도의회의원으로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을 했고 관제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제안자며 발기·제안자겸 사업부장을 역임한 그는 국민총력 조선연맹 활동에 앞장섰다. 일제 당시 총력연맹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치를 떨게 했던 단체였다.

 

당시 조선인을 전시에 총동원하기 위해서 자발적인 참여를 보이기 위해 만든 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용주는 임전보국단에 앞서 친일단체를 만든 전작이 있어 수월하게 임전보국단이 만들어졌다.

 

1941년 11년 24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에는 김용주의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임명 및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실려있고, 박 실장은 이에 대해 김용주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행위의 일환이었다고 설명한다.

 

1942년 2월 27일 매일신보 석간 3면에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에서 군용기 5대를 일제에 헌납했다는 기사가 실린 사실이 있다. 실제로 김용주가 활동했던 영일군에서는 총 8대의 군용기가 초과 헌납되어 전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 중 김용주가 임원으로 있던 경북수산어업조합에서 헌납한 2대의 군용기가 포함되어 있다.

 

1943년 9월 8일에는 일본 아사히 신문에 일제가 실시한 조선인징병제실시에 감사함한다는 뜻을 알리는 『징병제실시감사결의선양대회』 광고가 실렸고, 1943년 10월 3일자 매일신보 석간 2면에는 일제의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신사의 건립과 일본정신문화를 함양함을 독려하는 김용주의 말이 기사로 실렸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으로서의 역할론을 얘기했던 김용주가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일환으로 열린『징병제시행감사적미영격멸결의선양전선공직자대회』에서 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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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의 김용주 친일 행적 자료 설명

 

김용주는 43년 7월 9일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일제 찬양광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김용주의 일제에 대한 자발적, 지속적, 반복적 행위들과 실제적 영향력으로 봤을 때,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실장은 김용주의 친일행위는 간단히 얘기해 일본제국주의의 엄친아라는 평가를 내렸다.

 

박한용 교육실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세탁을 하겠다는 의도이며 친일의 역사와 억울하게 학살된 역사를 제대로 실어 기억의 공공화를 해야만 될 것이 이명박 정권이후 무산된 점을 지적하며, 현재 국정화를 추진한 뒷배경에는 친일 후손들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할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인간의 망각성향을 십분 활용해 암울했던 일제시대를 잊어버리게 만들 가능성이 다분하다.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를 수립해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고, 1945년 8월 15일 독립을 쟁취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은 임시정부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 헌법정신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 24일 일요일 구미시를 찾은 김무성 전 대표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강연을 했고, 자신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라며 참여한 시민들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참가한 사람 중 아무도 김무성 전 대표의 부친 김용주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본 사람은 없었으며, 차기 대권 주자로 행보를 보일 정치인에 대한 관심을 보였던 분위기임을 지역 언론을 통해 드문 알려졌다.

 

이날 김무성 전 대표는 구미시민들에게 대통령 권력의 분산 배치의 필요성에 대해 설파하며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정치를 하느냐가 문제다"라는 말과 함께 "제가 대통령으로 나서면 따르겠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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