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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뉴텍 그림이야기(5) : 막시밀리안 황제의 총살 (마네, 18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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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KTN) 이용범 기자=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당시 식민지였던 멕시코의 황제로 선임하여 멕시코로 보낸다. 그러나 재정 악화로 멕시코에서 프랑스 군이 철수하고 황제가 무력화되자 멕시코 게릴라 병을 이끌던 베니스 후아레스 일행에 의해 막시밀리안 황제는 처형당하게 된다. 

당시의 멕시코 상황은 1858년 가난한 원주민 출신의 법률가인 베니스 후아레스가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고, 당시 국민 대부분은 후아레스를 지지했으나 대지주·가톨릭 성직자들은 개혁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멕시코는 내전 상태에 빠졌고, 힘이 밀린 보수 세력은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했다. 해외 식민지 확장을 꾀하던 프랑스는 옳다구나 하며 이 사태에 개입하였고, 나폴레옹 3세는 1862년에 군대를 파견했고, 1864년에는 막시밀리안을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운 것이다. 막시밀리안 체제를 통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공고한 동맹을 유지하려는 이중 포석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프랑스 군은 반격에 나선 멕시코 공화군에 패배를 거듭했고, 1866년 결국 군대의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퇴위를 거부하던 막시밀리안은 결국 공화군에 체포되어 미구엘 미라몬, 토마스 메히아 두 장군과 함께 총살됐다. 

1867년부터 1869년 사이에 마네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하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총살' 그림을 대형 유화 석 점, 소형 유화 한 점, 그리고 석판화를 제작했다. 멕시코 공화군을 본 적이 없던 마네는 군인들에게 멕시코인의 일반적 복장인 통 넓은 바지를 입히고, 솜브레로라고 하는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웠다. 사람들 표정은 그려 넣지 않았다. 몇 달 뒤 마네는 이 그림을 밀어 놓고 두 번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은밀히 퍼진 처형 현장의 사진과 판화를 접한 마네는 멕시코 군복이 프랑스 군복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두 번째 그림부터는 군인들이 말쑥한 유니폼을 입고, 원통형 모자를 쓰고 있다. 사람들의 얼굴 특징도 알아볼 수 있다. 그림은 명확해졌지만 정치적 의미가 너무컸다. 막시밀리안의 죽음은 프랑스의 실패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예술을 검열했다. 그림은 전시될 수 없었고, 석판화도 출판되지 못했다. 

세 번째 그림은 막시밀리안 시리즈의 최종 완성 버전이다. 마네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추가했다. 황제 오른 편에 있는 메히아 장군이 총탄을 맞고 쓰러질 찰나다. 황제는 미라몬 장군의 손을 잡고 꼿꼿이 서 있지만 너무나 창백해서 유령처럼 보인다. 미라몬 장군의 어두운 얼굴에서는 공포심이 역력하게 보인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배경에 그려 넣어진 구경꾼들이다. 담장 위에서 사람들이 투우를 관전하듯 이 장면을 주시하고 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프랑스가 막시밀리안을 쏘았다!”라고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고, 이 그림들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비난한다는 이유로 전시가 금지됐다. 이 그림들이 세상에 나온 것은 20세기로 접어든 후였다. 이 작품은 고야의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에서 영감을 받은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총살, 중 3번째 그림으로 현재 독일 바덴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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